'Memento Mori', 삶과 죽음의 매개항으로서의 ‘다리’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도병규 그림의 소재는 벌거벗은 인형이다. 그것도 아기 인형에 국한돼 있다. 그가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는 화면속의 인형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모습을 띠고 있다. 연한 살색의 부드러운 고무로 만든 인형 그림은 특히 근작에 와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많다. 화면을 꽉 채우다시피 클로즈업된 인형의 얼굴은 따라서 관객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셈이 된다. 이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관객 역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화면과 시선의 정면 대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말해 준다. 필경 전시장에서 그림은 화면 속 인형의 눈이 관객의 시선과 맞닿을 수 있도록 알맞은 높이에 걸리게 될 것이다. 인형의 얼굴을 화면에 꽉 채워 그린 이번 근작을 통해 도병규가 의도하는 것 또한 이러한 시선의 전략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얼굴 그림은 마치 ‘인형의 눈을 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연한 갈색, 연한 검정, 혹은 서양의 어린이를 연상시키는 파란 색의 커다란 눈동자는 다분히 위압적이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요인은 커다란 눈의 모습에도 기인하지만 비록 아기 인형의 눈일망정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데 있다. 그것은 인형이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그런 사물에 작가의 감정이 이입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기묘한 미적 체험은 작가의 육필이 원래의 인형이 지녔을 법한 무표정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따지고 보면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의 객관적인 거리 유지가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연민을 느낄 수도 있고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이 그의 그림을 극사실주의의 범주에 넣기 곤란한 이유이다. 작가나 관객 모두 객관적인 거리의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도병규의 근작은 대략 두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예의 크게 클로즈업된 인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나 끈적이는 점액질처럼 보이는 용액에 잠긴 인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시선의 강렬함은 전자의 그림에 주로 쏠려있고 후자에는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물이나 점액질에 의해 한 꺼풀 덮여있기 때문에 다소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부류의 인형 얼굴의 그림들에는 서로 다른 상황성이 부여돼 있다. 전자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된 보다 선명한 그림들에는 인형의 분신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아기들이 얼굴에 산재한 작은 구멍에서 막 나오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다. 인형 이미지의 분신인 이 벌거벗은 아기의 작은 모습은 플라톤의 잘 알려진 비유에 의하면 이미지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원상(原象), 즉 진리로부터 삼 단계나 떨어져 있다. 그것은 작은 아바타처럼 보인다. 인형의 아바타.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인형만의 아바타에 지나지 않을까? 인형이 아이들의 완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인형의 아바타 역시 사람의 아바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도병규는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사이버 현실을 수작업에 의존하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매체인 회화를 통해 다루는 전복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 세계의 아바타 역시 인간이 고안해 낸 이미지 완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도병규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구나 사이버 상의 아기 아바타를 키우다 실제 아기를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진리로부터 삼 단계나 떨어진 가상(假象)을 경계한 플라톤의 혜안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예술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가상을 경계하라는 플라톤의 메시지는 도병규의 작품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부류는 물 혹은 맑은 점액질에 잠긴 인형의 이미지이다. 여기서도 역시 정면성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전자의 그림들과 다른 점은 인형들이 어딘 가에 갇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부글거리는 물이나 점액질의 요동치는 모습이 그런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도병규는 왜 굳이 이런 상황을 설정한 것일까. 이 장면은 인형을 물이 가득 찬 용기(容器) 속에 억지로 밀어 처넣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느 누군들 유년시절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까만, 이 가학적(加虐的) 행동이 그의 그림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시선의 전략이 엿보인다. 그림 속의 인형의 눈은 생기를 잃고 체념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그림들이 선명하게 표현된 반면, 후자의 그림 속의 눈은 물이나 점액질에 한 꺼풀 덧 씌워져 다소 흐릿하게 보인다. 아니면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가득 채운 양수 속을 유영하고 있는 아기의 모습일까? 그 어느 것이 됐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병규의 그림이 드러내는 것처럼 사회 속에서 개인적 자아가 겪는 심리적 갈등과 괴리감에 대해 주목을 하고 싶다. 어쩌면 유년시절에 형성된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를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자아 안에 내포된 ‘금기적 성향들과 욕망, 두려움’(작업 노트)에 연유한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죽음과 관련된다. “너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금언처럼 삶과 죽음을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이 이 주제에 내포돼 있다.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불교적 혹은 도가적 인생관이거니와,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Bridge>이다. ‘bridge'는 ’다리‘라는 의미로 전통적인 한국의 생사관에서보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항, 즉 중음신(重陰神)을 의미한다. 도병규는 태아와 태아 사이를 연결하는 탯줄로 작은 아기들의 이미지들로 연결된 줄을 전치시키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혼의 다리로서의 탯줄인 것이다.

도병규의 그림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와 같다. 인간의 가학성에 대한 고발은 사실 그의 관심사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징후는 사실 그의 그림 그 어느 곳에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아기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그런 징후와 의도를 감지할 수 있다. 도병규는 실제의 아기가 아닌 아기 인형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의 은유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가상이 때로는 실제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선례를 우리는 도병규의 그림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