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ocence and Sin – 잔혹한 놀이

이나바 마이(미술평론가)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아이들이 논에서 뛰쳐나온 개구리를 붙잡아 실컷 갖고 논 다음 죽이는 것을 보곤 했다. 끔찍한 일이다. 도병규 작가 역시 어릴 때‘잔혹한 놀이’에 몰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인 개구리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 남달랐다. 순수함과 잔인함….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혼재하는 모순된 양면성이 도병규의 작품에서 보이는 주제의 근원이다. 그는 그것을 ‘양가감정(兩價感情)’이라고 한다.

도병규는 인형을 모티프로 한 그림 시리즈에서 투명한 점액이 묻어있는 인형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귀여움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슬프고 으스스한 물체로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했다. 이 모순되는 양가감정은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전체 속에 잠재되고 있으며, 그는 그것들에 대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 동안 정밀한 그림을 주로 발표해 온 도병규가 이번에는 SYMBOL(기호)을 주제로 사진에 도전했다. 스마일(smile) 배지, 코코 샤넬, 피스(peace) 마크, 재활용 마크 등등…. 검은 화면의 한 가운데에 떠오르는 기호들은 모두 우리들이 평소 여기저기서 보아온 낯익은 기호들이다. 그런데 얼핏 팝아트적이고 귀여운 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기호의 주변이 ‘총기(銃器)’로 메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무수한 총기들이 보는 사람에게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작품 속의 총은 진짜가 아니라 손바닥만큼 작은 플라스틱 모형이다. 작가가 스스로 수집한 이들 미니어처 총에서는 그것이 갖는 본래의 잔인하고 냉혈한 성질이나 공격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이 무기력하고 초라한 작은 총들이 확대 촬영되면서 살상무기로서의 의미를 회복한다. 아니,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 총기 본래의 이미지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도병규의 작품은 평소 우리들이 ‘이미지’에 의해 사고와 행동이 얼마나 쉽게 좌우 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의 예로 명품 브랜드 마크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고급스러운 느낌이나 세련된 이미지는 결국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는 대기업의 이윤 지상주의와 그에 따른 수많은 희생이나 폐해는, 그 기호가 갖는 ‘엘레강스(elegance)한’ 이미지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피스 마크는 평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싸움의 수단 역시 무력이라고 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도병규가 보여주는 ‘498개의 복제된 총기로 만든’ 기호들을 통해 좋다든가 옳다든가 아름답다든가 맹목적으로 믿고 있던 가치가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정반대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어떤 억센 힘으로 그와 같이 믿게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시스템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한 믿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결코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런 믿음이 능동적으로 증식되어 새로운 권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는 말 없는 권력….이것이 도병규가 말하는 ‘재생되는 심상(心象)’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웃 나라 일본에서 기존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하는‘대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거의 모두 ‘원전(原電)은 안전하다’는 신화를 믿고 있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게끔 되어왔다. 잘 알다시피 신화는 하룻밤에 허물어져 버렸고, 우리는 그 비참한 현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되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도병규는 인간 사회의 모순된 상황을 의문시하면서도 한편에서 그 것들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애증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단순히 선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본질을 다양한 각도로 깊이 응시하는 일의 중요성을, 그는 제시하고 있다.